용사의 날(Day of Valor)이라고도 불리는 바타안데이(Bataan Day)는 Bataan Death March를 기리는 휴일이다.
다섯 달에 걸친 전투는 음식과 의료품,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치열하게 계속 되다가 미국인 병사들은 마닐라 베이로 유입되는 바탄반도 끝자락에서 1942년 4월 9일 일본군에 항복하게 된다. 전쟁포로들과 천 여명의 필리핀인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전쟁포로 캠프로 옮겨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지독히 힘든 여정이 이어졌다.
이것이 이름하여 Bataan Death March(죽음의 행군)였다. 이날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필 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그 처참했던 전투를 되새기는 의미를 가진다하겠다.
역사 속의 바타안 데이
세계 2차대전 때, 마닐라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미군과 필리핀 군인들은 일본군에게 항복했지만 일본군은 이때 잡힌 7만 8000여명의 미군과 필리핀 군인 등 전쟁포로들을 강제적으로 전쟁포로 캠프로 옮기는 죽음의 행군을 시켰다.
이중 미군이 대략 12,000여명이었고 나머지는 제대로 정규훈련조차 받아본 적이 없는 필리핀인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무고한 시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타안 반도의 남쪽 끝 마니벨레스를 출발한 대열은 산페르난도까지 55mile을 강제 진행 했고 이어 카파스까지는 열차를 이용했으며 다시 카파스부터 오도넬 수용소까지 마지막 24mile을 행군했다고 한다.
행군과정에서 포로들은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구타를 당하기도 했으며 낙오자는 가차없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7,000~ 1만여명의 포로들이 행진중에 사망했고 단지 5만 4,000여명만이 수용소에 도착했으며 나머지는 정글로 도망쳤다. 무고한 전쟁포로들이 갈증과 기아로 죽어갔고, 결국 무수한 주검만 남긴 채 긴 여정은 끝이났다.
오도넬 수용소에 도착한 처음 40일 동안 약 1,600명의 미국이 사망했고, 4개월에 걸쳐 20,000명의 필리핀 군인들이 사망했다는 기록도 전해졌다. 기본적인 수도와 위생시설조차 포로들에게 지급하지 않은 결과였다.
전쟁이 끝난 뒤, 그 행진의 책임을 물어 당시 필리핀 침공작전을 수행했던 일본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기소되었으며 1946년 1월~2월 마닐라에서 개최된 미국 군사위원회의 재판 결과 유죄가 인정되어 4월 3일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바타안 데이가 국경일로 지정되면서, 시민들은 희생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매년 이날 죽음의 루트에 긴 행렬을 만들기도 한다. 죽음의 여로를 엄숙하게 걸음으로써 그들의 희생과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