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이전에 스페인 통치에 대한 필리핀인들의 저항은 두가지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첫번째는 민다나오 이슬람 교도(무슬림)와 산악족의 스페인 통치에 대한 철저한 저항이었고 두번째는 스페인 통치를 타도하겠다는 필리핀 기독교신자들에 의한 반란이었다.
1590년쯤 스페인 인들은 일로코스, 타갈로그, 비사야스 지방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으나 민다나오 무슬림과 산악족을 저지시키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스페인은 그 당시 종교적 유대에 의해 가장 조직적이고 단합적인 이슬람단체(무슬림)를 가장 무서운 적이라 평가했다. 루손과 비사야스의 마을들은 여기저기 산재해 있어서 쉽게 정복되었지만 무슬림은 군인은 물론 선교사들에게도 여전히 강하게 저항했다.
스페인인들이 잠보앙가에 설치한 요새에 끊임없이 공격해오는 이슬람 필리피노들과 전쟁을 계속하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솔로와 라나오에서 스페인 기독교 단체들이 위치한 비사야스 지역을 급습해 스페인인들의 허를 찔러 마비시켜버리는 전술을 쓰기도 했다.
스페인 인들은 유골로테스와 네그리토스 같은 산악족을 진압하기위한 시도에서 또 한번의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는데 그 지역은 타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며 마을 주민들 또한 적대적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슬림의 습격, 저지대의 반란, 17세기 스페인과 네덜란드 전쟁으로 인해 스페인은 총력전을 위해 필요한 병력, 자금, 무기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총독인 마누엘 데 레옹은 Misiones vivas(active missions)라 불리는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군사들과 탁발지역 수도사들이 함께 배치된 이 중립지역은 산악지역과 진압된 지방간의 편리한 통상지역이 되었다. 스페인은 필리핀 중심지, 북서지역의 기독교화된 지방에서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좀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설명하는 몇가지 이유를 들어본다.
개인적 동기
최초의 반 스페인 봉기는 1570년 직후에 일어났다. 이는 스페인 정권하에 자신들의 특권과 세력을 잃은것에 분개한 몇몇 족장들에게서 시작되었다. 예를들어 1574년 라칸둘라와 그의 조카 솔리만에 의해 이끌어진 마닐라 폭동은 그 가족을 과세대상에서 면제시켜 주겠다는 스페인 정부가 그 약속을 파기함과 동시에 봉기되었다.
1587년 라칸둘라의 친척인 마틴판가와 오스틴 데 레가스피는 또 한번의 공모를 실패로 이끌었다. 프란시스코 다 고호이의 1744년 반란은 다른 종류의 불만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예수회 신부가 그의 동생을 교회장하는것을 거부했을 때 그는 분개했고 모욕감을 느꼈다. 보홀라노들을 톡동에 선동함과 동시에 서로간의 불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를 추종하는 많은 이들이 최고수치를 기록했을 당시는 2만명의 조직원들이 그의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거의 비슷한 어려운 처지에 매달려 있는 시민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연합성의 결여로 ACR인해 난관에 봉착했다. 반군들은 인근의 산악지역을 피신했으며 총격전 도중 다고호이는 목숨을 잃었다.
제도적 동기
식민지건설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규모의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여러가지 사안들을 빌미로 스페인이 필리피노 국민들에게 과세,독점, 공물, 강제노역과 같은 수익창출제도도 정부에게서 국민들을 통해 징수했다.
이러한 악습과 잔악성, 난폭한 활동이 스페인 정부에 대한 반란등의 활동으로 나타남과 동시에 지역반란의 시초가 되었다.
예를들어 마갈랏은 독단적이고 불법적인 공물징수에 항의하여 카가얀에서 1596년경 반란을 일으켰다. 1660년 프란시스코마나에고와 동지인 팜팡게뇨스는 어떤 보수도 없이 갤리온 선박건축을 위해 목재를 자르고 카가얀으로 나르도록 스페인들에 의해 강제 징발된 후 반란을 일으켰다.
유사한 이유로 안드레스 말롱은 팡가시난- 일로코스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곧 팜팡가, 잠발레스, 카가얀으로 확산되었으나 이전의 다른 반란들과 다름없이 금방 무산되어 버리고 말았다.
7년간의 전쟁 후, 스페인을 물리친 영국군은 마닐라를 점령, 식민통치를 지속해 나갔다. 1762년 비날라통간과 팡가시난 주민들은 공물징수 폐지와 부정부패의 극을 달리는 시장의 해임을 요구하며 주앙 델라크루스 팔라리스를 선두로 계속적인 반정부 운동을 해 나가던 중 1764년, 반란군 토벌 및 팔라리스 공개처형으로 막을 내렸다.
부당한공물상납과 악독한 지방 식민지배장관들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이에 분개한 디에고 실랑은 영국인들이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필리핀에 대한 관심이 소홀하자 비간과 일로코스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는 곧 팡가시난과 카가얀 밸리로 확산되어 갔다.
뛰어난 무기와 조직력을 갖춘 스페인 병력에 의해 진압되지 않도록 실랑은 영국정부와 협력하여 비간의 지방정부를 재조직 했는데 이때 그는 최고지도자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비간의 스페인 주교인 우스타리즈의 교란책으로 인해 일로카노들은 실랑을 버리고 스페인 정부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로카노들의 스페인 주교 추종으로 인해 뛰어난 지도자로 추앙받았던 실랑은 스페인 인이 아닌 필리피노에게 살해당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게된다. 그에게 앙심을 품고있던 공모자인 혼혈아 미겔 비코스와 실랑의 오랜친구 페드로 벡벡은 공모하여 실랑을 암살했다.
그가 암살당하자 아내 가브리엘라는 용감하게도 실랑의 독립군을 지휘하며 계속적으로 식민정부에 대한 투쟁을 계속했으나 필리피노 지방군들과 연합한 스페인 토벌군에 의해 패배하고 말았다.
스페인은 필리핀 중심지와 북서지역의 기독교화된 지방에서 발생한 식민정부에 대항하는 반란진압은 대체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종교적 동기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한 반란에 대한 원인을 살펴보면 첫번째로 스페인 점령 이전의 토속종교 회복과 두번째는 스페인 수도사의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이었다.
타야바스에서 단지 원주민이기 때문에 성직자가 될 수 없었던 아폴리나리오 델라크루스(헤르마노 퓰레)에 의한 코프라디아 데 산 호세라는 종교단체 설립은 1621년 보홀에서 탐블롯에 의한 반란과 1622년 리마사와의 방카우에서 벌어진 첫번째 종교관련 반란에 뒤이어 발생한 것이다.
헤르마노 퓰레의 반란은 1832년 종교단체설립부터 1841 그의 죽음 이후에도 1870년 그의 이념을 바탕으로 이 단체를 재구성, 지도했던 자누아리오 라비오스의 처형일인 1871년까지 이어졌다.